혼자 잘 놀고, 혼자서도 외로워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자신이 불편하지 않은, 남한테 피해주지 않는 한도내의 배려만 하는 마흔살의 조재희는 이제 여복이 터졌다. 같은 사무실의 윤실장이 8년을 넘게 짝사랑했지만 절대 몰랐던 그가 장문정을 만나 잠깐 설레이고, 703호의 유진을 만나, 상구를 만나 정(情)을 준다.
든자리는 몰라도 난자리는 안다고 하지 않나. 이제 조재희는 혼자서 다시 장문정을 만나기 전으로 상구를 만나기 전으로, 다시 유진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긴 힘들어 보인다. 그들이 피곤했고, 그의 생활을 방해받는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그러면서도 방해함에 적응했고, 사람과 부대끼는 것이 싫어도 그도 오지랖이랑 전혀 상관없이 살고 싶지만 타의든 자의든 이제 그도 어쩔 수 없이 신경을 뻗치고 살게 됐다.
처음엔 그랬다. 그냥 조재희란 캐릭터 그대로 살게 놔뒀으면 좋겠다. 아줌마니깐 저렇게 홀로인 생활을 즐길 줄 아는 싱글에 대한 헛된 로망이, 내가 아니더라도 저렇게 사는 사람이 한 둘쯤은 있어도 되지 않을까 싶어 보는 것만으로 대리만족이 됐다. 아이에, 남편에 치이지 않아도 되고, 신경쓰지 않아도 되고, 병원에 입원해도 학교는 제대로 갈지, 숙제는 제대로 해갈지 같은 책임감에서 벗어나 그 시간 만큼은 조재희란 인물에 푹 빠질 수 있어 참으로 좋았다.
주위의 여건상 그가 그의 생활을 방해받지 않으려는 노력은 이제 힘들어 보이는데 그는 여전히 그의 테두리를 지키려고 한다. 그가 원하지 않아도 이제는 다른 사람을 어쩔 수 없이 신경쓰게 되버렸고 그것이 책임감으로 시작했든 아니든 간에 어찌되었건 다른 사람을 신경쓸 줄 알게 되버렸는데 장문정의 좋아한다는 고백에 하룻 밤을 고민하고 진료실에서 만난 그녀에게 나도 좋아한다고 어설프게 말하지만 결혼은 못하겠단다. 그 이유인 즉슨, 같이 살집이 설계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안되서 못하겠다는 아주 우회적인 표현이지만 그 나름의 최선의 배려섞인 말이었는데 장문정은 내 나이가 몇인데 언제까지 연애만 하겠냐며 그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조금만 더 찌르면 조재희는 결혼도 할 것 같다.
장문정 그녀가 아주 이해되지 못하는 것도 아니지만, 조재희란 남자가 그렇게 쉽게 빨리 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녀의 태도도 문제가 있어 뵌다. 그런 남자를 8년 동안 아무런 내색 없이 좋아한 윤실장도 있는데 말이다. 그녀의 나이가 오히려 장문정 보다 많은 걸 보면 오히려 장문정 보다는 그를 이해할 수 있는 윤실장과 얽혔으면 하는 바램이다.
물론, 사랑이라는 것이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이쪽이 더 낫겠다 해서 결정 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맘먹은 데로 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아주 심하게 알지만서도 조재희란 남자 좀 그냥 내버려뒀음 하는 아줌마의 희망도 있다.
어찌되었건 이제 703호 유진이까지 가세했다. 불편한 거 싫어서 돈도 주려 했고, 책임감으로 떠맡은 상구를 책임감 이상으로 잘 돌봐주고 상구와 통하는 공감대까지 형성하고, 유진의 스토커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 같이 퇴근하면서도 그는 최선을 다했다. 귀찮아서 방해 받기 싫어 상구도, 퇴근 후 유진과의 동행도 싫어했던 그가 억지로라도 책임이 주어지면 진심을 다하는 그의 모습이 어린 유진에게도 감동이고 까불까불하는 현규같이 가벼운 남자랑은 비교 불가로 보이지 않을까.
늦게 여복이 터졌다고 해야 하나. 정작 조재희 본인은 모르는데 주변 여자들이 그를 가만 놔두지 않을 듯 하다. 빤지르르하게 말을 잘하지 않아도, 챙기지 않아도 그의 책임감이나, 깊은 속내를 알아본 여인들이 이제 그를 호감가는 남자로 취급하면서 이제 그는 더 귀찮아질 태세다.
아줌마의 희망사항은 그가 그의 희망사항처럼 연애만 하거나, 그의 일에 몰두하거나, 완전한 그의 취미생활을 즐기며 오지랖으로 외로움을 달랠 필요 없는 그가 더 좋았다.

